해제면 역사

 

 

아득한 옛날 해제고을은 어떠했을까?

기록이나 유물에 의존 해야하는 고대사의 특성상 해제의 옛날 역사를 알아보기는 무척 어려운 것 같다.

마한, 백제, 고려등 해제와 중앙관청과의 뚜렷한 연결고리가 형성 되 있지 않았고 지석묘나 옹관묘등의 유물이

대부분 도굴이나 훼손이 심하여 자료적으로도 아직까지는 부족한 상태이다.  

언젠가는 해제의 역사를 가늠해볼만한 자료가 발견되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로 이곳의 글은 어느정도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가 담겨있다 는 것을 밝혀둡니다.

 

해제에는 선사시대의 유적은 아직 발견되고 있지않으나 청동기시대의 유적인 지석묘가 대천,광천,구등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고 그 이후의 유적인 옹관묘등이 고읍리 일대에서 발견되고있어 청동기 시대부터 해제에는

주민이 거주하며 살았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고읍리 일대에서 발견되는 대형 옹관묘는 어는 정도의 집단적인 토착세력이 있었음을 알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백제시대 초기에는 영산강 하류 유역과 서남해안의 복잡한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이곳은 백제에 완전히 부속되지 않고

마한의 세력을 유지하다가 백제 문주왕2년 (476년) 경 완전한 백제 영향권으로 속한듯하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해제현(백제때 도제현)으로 되어있어 백제시대에는 도제현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때 개칭되었다고 볼수있다.

이때에 고읍마을일대에 요즘의 군청에 버금가는 행정치소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때는 국가 행정관청이라기 보다는 지역호족이 다스리는 형태라고 봐 야 할 것 이다.

옛날 뱃길의 중요성으로 볼 때 서남해안의 입구인 이곳이 요충지 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부분이다.

그 후 고려초기 후백제의 행적구역을 편의에 따라 나주현이나 함풍현에 귀속되기도 했으나

1018년(현종9년)영광현으로 귀속시켰다.

1391년(공양왕 3년) 임치에 권농방어사사 설치되어 이때 처음으로 국가 관청이 해제에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시기에 임치성과 봉대산 봉화대도 만들어 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1392년 영광군에서 함평군으로 부속되었으며 노,이,모,장,신 이렇게 5개의 성씨가 해제땅에 살고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위 성씨들 중 해제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하나도 남아있지않아 사회적인 영향으로 다른본관 등으로

합쳐지지 않았나 추측할 뿐이다.

조선시대에는 임치방어사가 수군진영이있는 임치진으로 되었으며 임진왜란, 정유재란,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전국각지에서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고 해제를 떠나는 변혁기를 맞이 하게된다.

 현제 해제를 대표하는 성씨의 대부분이 이때 이주해 왔으며 각 마을 이름도 이시기에 만들어진 이름이 많다.

1789년 호구 총수에 의하면 해제의 인구는 911호 2865명이었다.

한말인 1906년 9월 24일 칙령 49호에 의해 해제는 현제와 같은 무안군에 이속 편입되었으며

이때부터 현제와 같은 무안의 행정이 시작되었다.

1914년 53개 리이었으며 1915년 신정리 고읍 고이백두씨 아랫채에(현제는 터만있음) 직원 3명으로 최초의

면정을 시작하였다.

현제는 17개 법정리와 53개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